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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진실하게 그려낸 드라마다. 2023년 국내에 개봉되어 깊은 여운을 남긴 이 작품은 미국에서는 2022년 말 공개되었으며,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연 배우 브렌던 프레이저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며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더 웨일〉은 아론 소킨이나 마틴 맥도나 같은 작가 중심 영화의 계보를 잇는 정적인 연극형 영화로, 대사와 인물 관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이야기는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이며, 배경은 찰리의 좁은 아파트가 전부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감정과 갈등은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이 한정된 공간은 인물 간의 밀도를 더욱 끌어올리며, 인간 내면의 상처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전 작품 〈블랙 스완〉, 〈더 레슬러〉 등에서 인간의 극단적인 내면을 그려온 바 있으며, 이번 작품에서도 고립된 인간의 심리와 죄책감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더 웨일〉은 단순한 ‘비만인 남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실과 용서, 구원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무겁지만 정직하게 다루는 작품이다.
줄거리: 찰리의 마지막 5일
이야기의 주인공 찰리는 270킬로그램이 넘는 심각한 비만 상태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온라인 대학 강사다. 그는 화상 수업 중에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며, 좁은 거실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을 계기로 식이장애에 빠졌고, 자포자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찰리는 어느 날 급성 심부전 증세를 겪게 된다. 의사의 방문도 거부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찰리는, 죽기 전 딸 엘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한다. 찰리는 과거 이혼한 전처와 사이에 딸을 두었지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계기로 가정을 떠났고 이후 엘리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됐다. 하지만 이제 죽음을 앞둔 그는 마지막으로 엘리를 자신의 곁에 두고, 무언가 남기고 싶어 한다. 엘리는 반항적이고 거친 성격을 지닌 고등학생으로, 아버지를 전혀 용서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찰리는 그녀가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간병을 도맡는 간호사 리즈는 그런 찰리를 지켜보며 안타까움과 분노를 함께 느낀다. 여기에 종교 선교사인 토마스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더욱 복합적인 감정의 층위를 더해간다. 토마스는 찰리에게 영적인 구원을 말하지만, 찰리는 오히려 진실된 말과 용서를 통한 해답을 찾는다. 그는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엘리에게만은 진실한 감정을 전달하려 애쓴다. 찰리는 하루하루 점점 더 몸이 망가져가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진실된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한다.
브렌던 프레이저의 귀환
〈더 웨일〉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브렌던 프레이저의 열연 때문이다. 〈미이라〉 시리즈로 전성기를 누렸던 그는 긴 공백기를 거쳐 이번 작품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특수 분장을 통해 270킬로그램의 체중을 표현했지만, 그 이상의 무게는 감정에서 나온다. 찰리라는 인물을 단순히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으로 표현하지 않고, 지적이고 따뜻하지만 고통받는 존재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특히 대사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려 있으며, 눈빛과 호흡만으로도 복잡한 내면을 전달하는 장면들이 많다.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운 몸 상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시키고자 애쓰는 찰리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한다. 프레이저는 이 역할을 위해 감정적으로도 철저히 몰입했으며, 이 영화는 그에게 단순한 복귀작이 아닌 인생 최고의 연기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상대역인 홍 차우는 리즈 역을 맡아 극의 감정선을 안정적으로 이끈다. 그녀는 날카로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 캐릭터로 찰리와의 관계를 통해 복잡한 감정을 전달한다. 엘리 역의 새디 싱크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세 인물의 팽팽한 감정 대립은 영화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죄책감과 용서, 그리고 구원이라는 주제
〈더 웨일〉의 핵심은 '용서'에 있다. 찰리는 자신이 했던 선택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죄책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죄책감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진심 어린 사과와 이해를 구하려 한다. 이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종교적 상징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는 특정한 종교적 교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보다도 인간 본연의 감정과 진실된 태도, 그리고 소통의 가능성에 더 주목한다. 찰리의 마지막 메시지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이다. 그는 딸이 세상과 자신을 미워하게 되더라도, 그녀가 결국 자신 안의 선함을 깨닫길 바란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더 웨일〉은 대답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 질문이 남긴 울림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더 웨일〉은 무겁고 슬픈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인간애가 살아 숨 쉰다. 우리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만들고, 진심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이 감정의 밀도 높은 영화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깊은 울림을 전한다.